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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이 나서' 이후에 나오는 황경신 작가의 열 일곱 번째 책입니다.

저에게는 황경신 작가의 첫번째 책입니다.

 

에세이와 시의 언저리에 있다고 보는게 적절한 책이었습니다.

시가 아니라서 너무 함축적이지도 않았구요

에세이가 아니라서 너무 구구절절 하지도 않았어요

가장 좋았던 점입니다.

밤 열한 시는 이 책에 나오는 한 에세이의 제목이기도 해요.

아마도 가장 마음에 드는 에세이였거나

혹은 이 책을 쓰게끔, 시작하게끔 한 에세이였을지도 몰라요.

 

아래에는 마음에 들었던 구절들을 가져와 봤어요.

 

 

 

서머싯 몸의 '인간의 굴레에서'를 다시 읽고 있다

"아름다운 사물은 다음 세대들이 불러일으키는 정서 때문에 점점 풍요로워집니다. ''그리스 항아리에 부치는 노래'는 그것이 처음 쓰였을 때보다 더 아름답습니다. 백 년 동안 많은 연인들이 그 시를 읽어왔고 상심한 사람들이 그 시행에서 위로를 느꼈기 때문이지요

 

 

비록 덜 사랑하는 자가 권력을 가질지는 몰라도
사랑이 행하는 일을 온전히 겪는 사람은
더 사랑하는 자이다
정말 아름다운 일은 그 다음에 일어난다

 

 

믿을 수 있니? 아주 어릴 때부터, 난 그 노래를 불렀어. 수많은 밤들과 또 수많은 낮들이 폭풍우처럼 밀어닥쳤다가 밀려가는 어린 생의 바닷가에 앉아, 중력과 시간에 저항하며, 단 한 사람을 기다렸던 거야. 나를 지탱하고 있던 세계는 모래알처럼 부질없고, 서로를 끌어당기는 점성도 밀도도 없어, 조금만 휘청거리면 스르르 빠져나가고 말았지만, 그래서 나는 자꾸만 캄캄한 동굴 같은 곳으로 가라앉고 있었지만, 그래도 노래를 멈추지 않는다면, 누군가 와줄거라고 믿었어.
아직 시작되지 않은 사랑의 페이지를 펼쳐놓고, 내가 알지 못하는 누군가의 부드러운 눈빛을 상상할 때, 거품 같은 희망으로 나는 어쩌면 행복했는지도 몰라. 그리고 마침내 당신이 나를 찾아와, 나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라고 말해주었을 때, 동굴을 벗어나 비로소 환한 세상을 만난 거라고, 나는 또 믿었어.
그러나 어찌된 일이었을가. 당신이 쥐여준 희망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위태로웠고, 나의 심장은 참을 수 없을 만큼 나약하여, 그 어디로도 움직일 수 없었던 우리의 사랑. 내가 죽어 당신이 되거나, 당신이 죽어 내가 되거나, 우리 둘이 죽어 하나가 되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아닌 사랑. 오로지 하나가 되기를 원했고, 그래야만 했던 사랑. 그렇게 해서, 결국, 그 이야기의 끝은, 빛의 폭발, 모든 것이 날아가고, 당신과 나도 빛의 입자로 산산이 부서진 거야.
그날 이후에도, 날들은 내가 알지 못하는 곳을 떠돌고, 내가 잡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은 모래알로 빠져나가고, 나는 여태 동굴 속에 갇혀 있는 것 같아. 하지만 이제 나는 하나의 창을 갖게 되었어. 내가 알지 못하는 누군가가 아니라, 내가 아는 당신의 얼굴이, 그 창밖을 서성이지. 그래서 난 기다림을 멈출 수가 없어. 당신이 돌아와 나의 삶을 밝혀주리라는, 그 두려운 환상을 그칠 수가 없어. 믿을 수 있니? 나는 아직도 노래를 부르고 있다는 걸.

 

너무 빨리 오거나 너무 늦게 온다. 너무 일찍 사라지거나 너무 오래 남는다. 제시간에 제자리를 지킨 것들도 있었을 텐데, 너무 늦게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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